여백을 그리는 목자(김성수 목사)
고린도전서 묵상 11) 복음을 위하여(고전 9:12~18) 본문
고린도 교회는 결혼에 관한 질문 다음으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선생들은 다들 제자들의 섬김과 사례를 받아 생활하는데,
왜 바울 선생님들은 자비량으로 사역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이 일로 바울은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비난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메시지에 무슨 문제가 있으니,
바울은 당연히 선생으로서 주장해야 할 권리를 말하지 못하고,
저렇게 스스로 밥벌이를 하며 사는 것이라고
바울의 메시지를 힐난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질문에, 자신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군인이 자신의 군복무 비용을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며,
포도원지기가 포도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목동이 양의 젖을 먹을 수 있지 않는가?
자신도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였으므로 당연히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기로 결정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며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
제사장은 제단에서 섬기며 제물을 함께 나눈다.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이 일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레위인이 성전에서 봉사해야 하는데,
자신의 먹고 살 거리를 위해 낮에는 농사를 지으러 가야 한다면
어떻게 봉사가 가능하겠는가?
제사장이 제사를 준비하면서, 내일의 뗏거리를 걱정해야 한다면,
어떻게 섬김이 가능하겠는가?
임박한 종말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신속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섬김을 받으며
사역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씀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아니 따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도 없는 이방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자신의 생활비를 요청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는 자비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이 생활비를 바라는 직업적 사역자가 아님을 말한다.
당시 교회들 가운데 거짓 교사들이 생활비를 바라고,
거짓이나 속임수, 아첨을 하며 사역하던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부득불 할 일이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른 일이라고,
다른 것을 바라는 사역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교회의 생활비를 받아 생활하는 사역자이다.
바울처럼 자비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생활비를 걱정하며, 통장 잔고를 두들겨 보며,
마음이 나누어지는 사역자가 아니라.
성도를 섬기는 사역에 더 집중하라고 불러주신 은혜이리라.
오늘도 사례비 때문에 사역하는 삯꾼이 아니라,
부르심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도록 달려가는 사역자가 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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