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여백 묵상

2019.12.09. 아침묵상 약_3_13_18_참된 지혜

김성수목사 2019. 12. 9. 06:43


 

며칠 전 95세 권사님이 입소하신 요양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상가 건물 3층에 위치한 작은 병원입니다.

입구에 도착하고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큰 요양원도 아니 이리 작은 곳에 와 계시면 불편한게 많을텐데.

그런데 들어 가보니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6,7분의 어르신과 3,4명의 요양보호사가 계셨고,

일 인실에 3인실까지 4개의 방이 있는 아늑한 장소였습니다.

물론 이윤을 창출해야하는 곳이기에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돈벌레처럼 악다구니를 벌이지는 않겠다 싶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사명감이 사회의 근간을 붙들고 있었는데,

월급 몇 푼되지 않지만 교사들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명감에 교편을 잡았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은 돈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사랑에 그들을 안아주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아니 돈에 눈먼 이들이 그 자리를 빼앗고 있다.

아이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하던 문방구는 사라져 가고,

코 묻은 돈으로 한 컵 가득 채우던 분식집도 사라져 가고 있다.

 

물론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대기업의 동네 상권 장악에도 변명이 있더라.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들의 지혜로운 말이 아무 의미 없는 외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참된 지혜는 그렇게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말은 아무리 뻔지르르하게 포장한다 할지라도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뽐내거나 진실을 왜곡하는 일들이 있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닌 것이다.

참으로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면,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럼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

야고보는 참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서의 지혜가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샬롬의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샬롬을 전할 수 있는 지혜여야 한다.

 

어느 목사님의 대()자 유감의 칼럼처럼,

교회마저도 욕망의 대()형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시대 속에서

샬롬의 하나님을 어찌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아침이다.